Thursday, June 03, 2010

Close Call

선거가 끝났다. 너무나 박빙의, 정말 초접전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던 서울시장선거를 비롯하여 지방선거가 이제 그 막을 내렸다. 결과는 야당의 압승. 민심의 이완현상을 막을 수 없었던 한나라당의 오만과 착각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다. 북풍을 이용하여 몰아붙인 전근대적인 발상에다가 2006년 선거에서 완승했던 기억을 자만으로 발출한 교만이 어우러져 국정의 운영권을 다 내주고만 것이다. 아싸.
역시 민주주의는 국민의 마음을 먹고 사는 것이며 국민의 마음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제 인터넷을 보며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댓글 두 개가 생각이 난다. 하나는 "주인 섬기라고 머슴시켰더니 주인행세하다가 망했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천안함에 써있던 1'번'이 너무 무서워서 선거때도 1'번'을 못찍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국민의 의사가 이렇게 전달이 되었지만 현재까지 이장로님의 행태를 봐서는 잘 모르겠다. 폭탄주 -아니 막걸린가?-한 사발에 선거결과 깨끗이 잊고 다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다.
선거결과의 많은 부분들이 close call이었다. 서울, 경기, 충남 등등....결코 야당이 좋아서 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민주당도 알았음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는 close call로 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님이다. 그 때도 국민들은 한나라당이 좋아서 찍는 것이 아닐게다. 역사는 되풀이 되지만, 조금 더 성숙한 선택들에 의해서 전진되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Tuesday, June 01, 2010

주 품에

이 찬양을 들으면 주님의 임재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리 나그네로서의 삶이 고단하고, 어렵더라도, 지치더라도, 그 폭풍 속에 주님의 임재가 있기에 나 역시 잠잠할 수 있는 것을 믿게 된다. 아니, 잠잠한 것이 아니라 평안일게다.
때로는 상황 앞에 격렬한 열정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잠잠함으로 주님을 보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바로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주님이 내 속에 계심을 확신하게 되며, 나의 영혼 주님과 함께 비상하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사는 날 동안 주님의 능력의 팔이 늘 함께 계셔서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는 삶을 살고 싶다....그런 사랑을 전하면서...

Hide me now
Under your wings
Cover me
within your mighty hand

When the oceans rise and thunders roar
I will soar with you above the storm
Father you are king over the flood
I will be still and know you are God

Find rest my soul
In Christ alone
Know his power
In quietness and trust


When the oceans rise and thunders roar
I will soar with you above the storm
Father you are king over the flood
I will be still and know you are God

1.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2. 주님 안에 나 거하리 주 능력 나 잠잠히 믿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Wednesday, May 19, 2010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천국의 주도권/구원의 주도권은 오로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 맘대로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기준대로, 사람의 잣대로 공평성을 평가한다면 실족하게 될 것이다. 사실 잘못된 것이 없다. 왜냐하면, 13절의 말씀처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며, 14절처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것과 부자청년에 이어서 오늘 본문 역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는 진리를 가르치신다. 천국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Reversal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논리가 지배하지 못하는 곳이 천국이며, 천국에는 그곳의 원리가 있다. 그곳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다.
또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사실 모두가 주인이 부르지 않았으면 포도원에 들어올 수도 없는 자들이었다. 주인이 불렀기 때문에 와서 일한 것이다. 6절에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고 주인이 물었을 때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고 말한다 (7절). 이 사람들은 아무도 들이는 사람이 없었는데 주인이 들인 것이다. 은혜다. 그 은혜 앞에 따질 것이 없는 것이다. "God's grace, in short, is not the sort of thing you can bargain with or try to store up. It isn't the sort of thing that one person can have a lot of and someone else only a little. The point of the story is that what people get from having served God and his kingdom is not, actually, a 'wage' at all. It's not , strictly, a reward for work done. God doesn't make contracts with us, as if we could bargain or negotiate for a better deal. He makes covenants, in which he promises us everything and asks of us everything in return. When he keeps his promises, he is not rewarding us for effort, but doing what comes naturally to his overflowingly generous nature" (Wright, Matthew for Everyone II, 57). "요약하건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흥정거나 쌓아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이 얻는 것은 실제로 '삯'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일을 잘해서 얻는 상급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더 좋은 조건으로 흥정 혹은 협상하는 것과 같이 계약을 맺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모두 이행하도록 요구하시는 언약을 맺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넘치도록 너그러우신 성품에 맞는 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만약 라이트의 말대로 이 비유가 제자들을 향한 것이라면 (분명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주님을 섬기는 가장 핵심에 있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먼저 은혜로 있게 되었을 뿐 은혜를 먼저 체험하고 받았다는 것이 상급의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섬기는 것, 최선을 다해 은혜를 알고 갚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나에게 적용한다면
  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깨닫고 있는가? 포도원 밖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던 나를 은혜로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부르신 그 은혜, 아무런 공로 없는데 부르신 그 은혜를 나는 더욱 깊이 깨닫는가?
  2. 같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과 경쟁하는 모습은 없는가? 좀 더 익숙하다고 해서, 좀 더 수고했다고 해서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얕보는 경우는 없는가?
  3. 보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일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보상을 위해 일하는가?

Thursday, April 29, 2010

복음에 서 있는 삶

점점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 힘들다. 어려서는 참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복음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복음이 여전히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내 생활도, 목회도, 공부도, 모든 것이 "복음적"이면 좋겠다. "십자가 중심"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Wednesday, April 21, 2010

진국 인생

나는 곰탕을 무척 좋아한다. 뽀얗게 내린 국물에 밥을 말아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다음 파를 잔뜩 넣고 깍뚜기 국물을 가득 부어 한 입 후루룩~ 하면...캬....곰탕의 생명은 뭐니뭐니해도 국물에 있다. 오랜 시간 푹 고아서 우러난 그 국물의 맛이 없다면 그것은 곰탕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음식점에 가면(물론 어제 오늘일은 아니지만) 곰탕의 국물맛 대신 프림맛이 난다. 국물을 오래 오래 고아서 제 맛을 내려면 시간과 정성이 아주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간의 맛을 내기 위하여 조미료로 맛을 내고, 프림으로 색을 내는 것이다. 그런 곰탕을 먹고나면 뱃속에서의 반란은 말할 것도 없고 기분이 무지하게 나빠진다. 그리고 이내 진국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런 진국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이스하면서 중립을 지키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도를 읽으며 철저히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고아낸 국물처럼 찰나의 맛은 없어도 푸근한 사람이 그립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그런 진국으로 남기를 소원해본다.

Sunday, April 18, 2010

Josh's birthday party

우리 아들 하람이가 벌써 9살이다. 한국나이로는 10살이다. 오늘 가족들과 함께 (이모네, 장모님), 생일 파티를 했다. 필레미뇽 스테이크를 그릴했는데 지금까지의 작품중 가장 맛있게 되었다. 거하게 먹은 후 볼링 행.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정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조카 주안이가 스스로 볼링공을 잡고 치는 것을 보면서 다들 신기해하고 웃었다. 우리 장하고 잘생긴 아들이 이름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나가기를 기도한다. 사랑한다, 내 아들!

Thursday, April 15, 2010

Pastoral Sensitivity?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목회적 민감함" 정도가 되겠다. 학자들간의 격렬한 토론을 지켜보고 읽으면서, 그것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서로의 논지와 이론을 발전시켜 주기는 하지만, 때로는 상대의 감정을 찌르는 (의도했건 아니건) 비수가 되어 꽂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 같이, 학자들의 세계에서 실력이 없으면 "매장"당하는 (그것도 아주 nasty하게) 현실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좀 더 곱게 포장된 세계의 축소판이 아닐까? 한마디 글을 쓰더라도 그리고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상대의 감성과 인격을 헤아리며 행해지는 글쓰기와 말하기가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naive한 생각이 아닐까? 그런 사람을 실력없는 사람으로 한 수 아래 잡아보며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격려해주며 함께 세워져 가는 것을 꿈꾸는 것은 이상인가...